갈라디아서: 복음을 만나다 - 팀 켈러
1.
매일매일 내 자신에게 설교하고 방향을 잡아나가기 위해서 팀켈러 목사님이 갈라디아서에 대해 쓴 책을 잡았다. 요즘 뭘해도 허무하고 의미없게 느껴진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것들로도 그 허무함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회사일, 돈, 관계, 건강 등 나는 부족함 없이 누리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 하지만 내 마음 속 한 켠에 덮을 수 없는 공허함이 있다. 아마 하나님께 매일 감사드린다고 기도는 드리지만 내가 제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 매일 조금씩이라도 하나님의 복음을 묵상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더 잘 알아가야 한다.
2.1.
하나뿐인 복음 / 그리스도의 은혜
인생을 살다보면 다양한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종교에 대한 유혹도 그 중 하나일텐데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지 낮은지, 지식이 얼마나 많은지 적은지와 상관없이 이단에 속아 넘어가서 탈탈 털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로 인해서 가정이 파괴된 경우도 있고 그로 인해서 국가가 혼란에 빠지고 분열되는 경우도 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단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우선은 종교의 지도자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종교의 지도자가 종교의 대의를 내세우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고 자기 스스로를 높이려고 한다면 이건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낮아지려고 했고 제자들의 발을 씻고 사람들을 섬기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내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아닌지는 철저하게 '복음'을 기반으로해서 판단해야 한다. 여기서 "복음을 기반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는 이 책에 아주 잘 나와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그리스도 외에 무언가를 더한다면, 다시 말해서 구원받으려면 그리스도의 은혜도 있어야 하지만 다른 것도 더 필요해라고 말한다면, 복음의 "순서"는 완전히 전복되어버리고, 복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빈껍데기가 되어버린다. 다른 복음이라고 하지만 그딴 복음은 절대 없습니다.
바울이 아래와 같은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가르침이든 단호하게 정죄하고 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지독한 죄인이어서 우리의 구원에 어떤 보탬도 할 수 없다(우리는 전적인 구조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 우리는 예수의 공로, 즉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써만 구원받는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쓸 만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사랑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사랑 안에서만 안전하게 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랑이라야 잃어버릴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만약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인이 되셨다면 우리는 같은 방법으로 의롭게 된다. 그분이 저주를 담당하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죄인으로 간주되신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가 복을 받는 것는 하나님에 의해 완벽하게 의롭고 흠 없는 사람으로 간주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써만 구원받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더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구원을 내세우면서 어떤 특정한 종교의식을 강요하거나 금품을 요구하는 그 모든 것이 다 복음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것이다.
기독교라고 하더라도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올바르게 전하고 사람들을 섬기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인 것이다. 교회마다 문화적인 차이는 있고 분위기도 다르고 방식도 다른 것이 당연하고 그건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복음을 기초로 하지 않다면 그건 잘못된 것이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교회를 다니는지 여부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여부이다. 내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믿고 그 은혜와 사랑에 기초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고 헌금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2.
율법의 목적과 복음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의로움을 얻을 수 없다.
바울은 철저한 성경적 도덕과 종교를 통해 구원을 얻겠다는 발상은, 이교나 부도덕한 관행만큼이나 우상에게 매이는 행위라고 말한다. 종교적인 사람은 결국 종교를 무시하는 사람만큼이나 길을 잃고 얽매인 사람이다.
갈라디아서를 읽어가다 보면,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그저 의지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의 실패를 "더 열심히"라는 구호로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더 열심히"를 결심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의 노력에 더 의존하는 것이다. 모든 불순종의 근원은 행위로써 의로움을 얻는 체계를 의지해 자신의 삶을 계속 통제해보겠다는 고집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육체는 우리 안에서 우리가 스스로의 구주요 주님이 되길 원한다. 샤륵스적인 마음은 "율법 아래에" 있도록 기능하여, 그리스도의 의와 구원이라는 공짜 선물을 거절하고 스스로의 것을 계속 추구하게 한다. 따라서 모든 죄들의 밑바닥에 있는 죄, 곧 우리가 불순종하는 근본적인 동기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믿지 않는 마음과 자기 구원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지켜내보겠다는 염원인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인가?
율법으로 인해서 그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형편없는 인간임을 알게(그리고 느끼게) 되었다. 단지 죄인 정도가 아니라, 풀려나거나 나아질 가망이 전혀 없는 죄의 노예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율법의 목적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못 미치니 곱절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죄의 세력 아래 있기에 구원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바울은 율법이 우리의 죄를 보여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고 요약해 말한다. 율법은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이 필요함을 알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약속에 받대가 되는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약속을 지지한다.
우리가 얼마나 가망 없고 근본부터 죄인인지 깨닫지 못하면, 구원의 메세지는 날아오르는 감격의 해방을 맛보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얼마나 큰 빚을 졌는지 모른다면 그리스도가 얼마나 큰 지불을 하셨는지 상상도 못할 것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악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면 은혜는 결코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 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령께서는 스스로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받아주심과 완성시켜주심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만을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의지할 때 역사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끊임없이 회개하고 그 고집을 뿌리뽑는 것이다. 처음 회심했던 때처럼 그리스도가 하신 구원의 사역을 생생하게 그려보고 우리 자신을 스스로 완성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 돌아가서 그분이 하신 일의 실재와 그분 안에 있는 우리 정체성에 더 깊이 붙들려야 한다.
2.3.
삶의 변화
우리는 복음의 요지와 방향에 "맞도록" 삶 전체를 가지런히 해야 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의 의미를 되짚어봐야 하고, 우리의 사고와 감정과 행동을 "정비"해야 한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좋게" 하고자 하는 마음, 즉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 동기"를 없애준다. 복음은 그것을 정반대의 것,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 마음으로 바꿔놓는다. 달리 말해서 복음은 강한 확신으로 두려움을 모르는 예수의 제자들을 만들어낸다. 이들은 인정과 칭찬 받는 데 연연하지 않고 옳은 일을 해나간다. 바울은 자신이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자라면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매일 확신과 담대함이 함께 한다. 우리는 누구도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가 다 관장하신다. 하나님은 자기의 하나뿐인 아들에게처럼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고개를 쳐들고 산다. 온전해지지 못하면 어쩌나 인정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은 우리가 자녀 된 것으로 이길 수 있다. 우리가 불순종하는 근본적인 이유 중 상당 부분이 바로 이 두려움이다.
그리고 장차 나누게 될 하나님의 영광까지 보장받았다. 자녀 됨에 담긴 놀라운 사실은 예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마치 내가 다 한 것처럼 하나님께 예우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예수님처럼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 대접 받는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는 확실한 소망이 주어지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흘러넘치는 사랑이 된다.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서 메마르거나 냉랭해진다면, 그 근본적인 이유는 믿음으로 우리의 소망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더 많이, 더 잘 사랑하도록 애쓰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다. 잃어버릴 수 없는, 흔들리지 않는 아버지의 용납하심을 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소망 가운데 머물게 될 것이므로,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고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복음은 새로운 자아상을 만들어준다. 오로지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중요한 오직 한 분의 눈에 사랑스럽고 존귀한 자임을 알려주어 우리를 담대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복음은 공존할 수 있고 동시에 확장될 수 있는 담대함과 겸손을 허락한다.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험과 의무에 집중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반응해야 한다. 이런 시간으로 바라본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 사람일 수 있었는가 매일의 삶을 평가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 우월하건 아직 열등하건 간에 성장을 했다면 그에 합당한 자긍심을 보일 것이다. 부족한 사람과 스스로를 비교하지 않을 것이고 또는 더 많이 이룬 사람과 비교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각자 다른 짐을 주셨고, 그 짐을 지고 그분을 섬기라고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각자의 짐을 지면 된다.
3.
책을 잠깐 덮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꼭 기넉하고 싶은 구절이 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 갈라디아서 6장 8-9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 갈라디아서 6장 14절
세상의 인정에 따라 열등감을 갖지도 말고 교만해 하지도 말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 보면서 살고 싶다. 여전히 나의 머릿속은 세상의 우상과 죄로 가득차 있지만 매일매일 순간순간을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육체를 위하여 심지말고 오직 성령을 위하여 심고 싶다. 비록 시간은 걸리겠지만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선을 이뤄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