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고의 책이다.
처음에 읽으면서는 예수님에 대한 나의 잘못된 생각들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직업적인 불안정성과 건강문제로 인해서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는 시기였고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테니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직업적으로 성공하게 해달라고 헛된 욕망 만을 쫓던 시기였고 일이 안 풀리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일쑤였다. 내 인생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한 적도 없었고 발생해서도 안 되는데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주변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고 싶은 나의 욕망과 그 부분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죄책감이 뒤엉켜져 있던 때였고 아침 새벽설교를 듣고 기도 빈도를 늘리면서 그 죄책감을 달래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 머릿속에는 오로지 돈과 성공만으로 가득찼던 시기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풀렸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시고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 분을 믿고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시고 올바른 관계를 정립시켜 주신 것이다. 매일매일 두려움으로 나를 억압했던 암이라는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두번째 읽을 때는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성경은 어떻게 살라는 조언이 아니라 복음이다.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에 대한 내용이고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팀 켈러 목사님이 복음서를 읽으면서 전에는 성경을 탐구하고 분석하는 느낌이었는데 성경, 아니 성경 속의 어떤 분이 나를 탐구하고 분석하는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나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얼마나 큰 사랑을 보여주셨는지 내가 마음의 평안과 자유를 찾는 길이 무엇인지 '나'에 대해서 배우고 깨달을 수 있었다.
'왕의 십자가'는 마가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이 십자가를 선택하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부활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다루고 있다.
나는 내공이 부족해서 성경책 만으로는 그 안에 함축되어 있는 중요한 내용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팀켈러 목사님의 해설을 통해서 훨씬 성경의 내용을 깊이 있게 알고 깨달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주님과 춤추는 순간 영혼이 살아난다.
하나님은 기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우리를 지으신 게 분명하다.
"나를 믿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가끔 기도하면서 종교인의 외향만 갖추어서는 부족하다. 힘들 때 내 말씀에서 약간의 힘을 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너는 나를 중심으로 살도록 창조된 존재다. 매사에 나를 생각해야 한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섬겨야 한다. 거기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부르심을 따라가는 삶이 진짜다.
여타 종교들은 이렇게 조언한다. "신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살아야 신 앞에 설 자격을 얻는다." 복음의 메시지는 전혀 다르다. "이 사건이 역사 가운데 일어났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며 죽음이며 이로써 당신이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기독교는 기쁨이 넘치는 소식이다. 인생살이에 대한 조언을 얻으면 중압감이 생긴다.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연결하시되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또는 안했는지)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역사 속에서 이루어 주신 것에 대한 소식이다.
복음은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우리가 획득할 필요가 없다는 소식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미 획득해 주셨다. 그 길은 우리가 순전히 은혜로 받는 선물이며, 자격을 따지지 않고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주어진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나와 함께 여행을 하자. 샛길로 빠지지 말아야 한다. 나를 가장 중시하고 나만 믿으라. 내 뒤에 딱 붙어 따라오너라. 되돌아가지 말라. 포기하지 말라. 실패하고 불의를 겪을 때마다 나를 의지해라. 도대체 왜 나를 이리로 데려가시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 때조차 나를 믿으라."
영혼의 속살까지 그분께 맡기라.
진정한 문제는 우리 각자가 예수님 외에 다른 것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이든, 어떤 사람과의 특별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든, 심지어 일어나 걷는 것이든. "이것만 가질 수 있다면, 소원만 성취된다면, 그러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텐데"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불행과 환멸에서 구원해 줄 것을 찾고 있다. 이 소원을 구세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이 소원을 이루면 더더욱 공허하고 불만족스러워진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만나면 진정한 만족이 찾아올 것이다. 나는 너의 진정한 구세주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라.
모든 종교의 이면에는 공통된 논리가 있다. 내가 잘해야 비로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이 논리와 완전히 정반대 입장을 위한다. 먼저 예수님이 나를 온전히 받아 주셨기 때문에 내가 순종하는 것이다.
종교에서 율법을 지키는 목적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는 율법의 세부 항목에 연연한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삶에서 하나님의 법을 공부하고 순종하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죄의 결과로부터 구속해 주신 분을 기쁘시게 하고 닮아 가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본질적으로 이는 모든 죄가 그분에게 지은 죄라는 주장이다. 용서란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해서만 할 수 있다. 따라서 죄는 바로 하나님이 당하신 일이며 이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신 것이다.
예수님 같은 주장을 펼치는 사람을 단순히 좋아할 수는 없다. 미워하든가 진심으로 따르든가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 사악한 거짓말쟁이요 미치광이로 여겨 거들떠보지도 않던가. 그분을 정말로 하나님으로 여겨 그분 앞에 엎드려 "무슨 명령이든 내리세요"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인생의 배가 침몰해도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허락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계획이나 논리에 따라 역사하시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허락하시는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힘만 무한한 게 아니라 지혜와 사랑도 무한한 분이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나쁜 일을 허락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상황을 꿰뚫어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강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대상이다.
"어찌 저를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님의 몸이 궁극의 풍랑에 빠지는 장면이 존재 깊은 곳에 각인된 사람은 결코 그런 말을 내뱉지 않는다. 궁극의 풍랑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 분이 현재의 시시한 풍랑 속에서 우리를 버리시겠는가? 게다가 언젠가는 그 분이 돌아오셔서 모든 풍랑을 영원히 잠재우실 것이다.
내가 가라고 하는 깊은 물을 지날 때 비통의 강은 넘치지 않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네 고난을 축복하리라. 네 깊은 고통을 씻어 주리라. 예수님께 기대어 쉬었던 영혼 내가 원수에게 넘기지 않으리라. 온 지옥이 그 영훈을 흔들려고 애써도 내가 절대, 절대 버리지 않으리라.
주님의 타이밍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데에 지체하시는게 아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지체하신 것이다. "내가 다 알아서 하마. 내 시간표를 너의 시간표에 맞추려고 하면 내 사랑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지금 당신은 예수님을 재촉하고 있는가? 기다림에 조바심을 내고 있는가? 그러지 말고 예수님의 손을 잡고 그분이 이끄시는대로 믿고 따라가는 것이 어떤가? 예수님은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실지 알고 계신다. 곧 일어나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예수님께 가면 애초에 드리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을 말씀하실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요구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무한히 많은 것을 주실 것이다.
날마다 보혈로 속사람을 깨끗케 하라.
과거에 저지른 실수 하나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가? 평생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는가? 카프카처럼 특별히 악하지도 않으면서 열등감과 싸우고 있는가? 종교나 정치, 아름다운 외모로 이 열등감을 치유하려고 애쓰고 있는가? 심지어 기독교 목회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가? 하지만 외적인 노력은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
당신의 치명적인 '행위'를 예수님의 발치에 던져 놓지 마라. 그 분 안에, 오직 그분 안에만 영광스럽고 온전히 서라.
열정을 갖고 자비로운 분께 과감히 나아가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삼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너무 교만해서다.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의 직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유는 열등감이다. 자의식에 사로잡혀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실 리가 없어!"라고 말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은 자신이 그분의 용서를 받을 만큼 잘못한 것이 없다는 말만큼이나 큰 잘못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아신다.
예수님은 권력을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바닥까지 낮아지신다. 그분은 세상을 취하기는커녕 섬기신다. 그 분은 보복하러 오시지 않았다. 오히려 보복을 당하러 오셨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부스러기조차 없이 상에서 완전히 내침을 당하셨다. 덕분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우리는 입양을 받아 그 상 앞에 앉게 되었다. 우리를 아들달의 자격으로 상에 앉도록 만들기 위해 아들이 개가 되셨다. 예수님이 이처럼 우리의 처지가 되신 덕분에 우리는 얼마든지 그분께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자격이 없다. 이런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교만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의기소침할 필요도 없다.
십자가를 따라 세상과 반대 방향으로 가라.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의 차이는 이렇다. 가짜 사랑의 목적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것이다. 가짜 사랑에는 조건이 붙는다. 자신을 지지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준다. 가짜 사랑은 언제나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다. 자신에게 해가 된다 싶으면 즉시 몸을 뺀다. 하지만 진짜 사랑의 목적은 남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내주는 것이다. 상대방의 행복을 내 행복으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이 사랑을 준다. 진짜 사랑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랑이다. 아낌없이 전부를 내주는 사랑이다.
우리는 진짜 사랑을 갈망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사랑을 할 능력이 없다. 조건없이 파격적으로 사랑해 줄 분, 우리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해 줄 분, 이런 사랑을 받고 나면 우리 안에 자존감이 충만해져 비로소 우리도 그런 사랑을 나눠 주기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해 줄 분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내가 인류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너희 아니면 내가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죄에는 언제나 형벌이 따른다. 누군가가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죄는 없어지지 않는다.
온 천하를 얻어도 존재 깊은 곳에 묻은 공허함의 때를 지울 수는 없다. 세상적인 것을 아무리 많이 얻어도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남의 사랑이나 직업적 성공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면 그런 것이 무너지는 순간 살아갈 의지도 잃는다.성과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 것을 그만두고 예수님과 복음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라.
자신을 포기하면 진정한 자신을 얻으리라. 목숨을 잃으면 목숨을 구원하리라. 죽음, 즉 매일 자기 야망과 소원의 죽음. 결국에는 몸 전체의 죽음에 온전히 순응하면 영생을 얻으리라. 그 무엇도 움켜쥐지 말라.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은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우리 안에서 죽지 않은 것은 부활할 수 없다. 자신을 추구하면 결국에는 미움과 외로움, 절망, 분노, 파멸, 부패만 얻는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추구하면 그분을 찾을 뿐 아니라 나머지도 덤으로 따라온다.
영광의 죽음을 이겨 낼 힘을 얻으라.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고 계신 일을 똑똑히 봐야 한다. 하나님이 언젠가 우리에게 해 주실 포옹을 미리 맛보아야 한다. 머리로 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도 느껴야 한다. 영광스러운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지켜 주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무엇이든 실제로 맛보아야 거기서 영양분을 얻고 강해질 수 있다.
"저는 믿음이 없습니다. 제 안에는 의심이 가득합니다. 제 도덕적, 영적 능력은 보잘 것 없습니다. 그래도 저를 도와 주세요." 이렇게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바로 구원하는 믿음이다. 우리에게 완벽한 의는 불가능하다. 완벽한 의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평생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자신이 의롭지 않다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게 된다. 회개하고 자복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면 바로 그것이 예배다.
손에 쥔 것을 모두 내려놓으라.
예수님은 부가 죄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모두가 죄인이지만 돈이 특히 죄를 보지 못하도록 만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돈의 기만적인 힘은 엄청나다. 그래서 돈에 눈이 멀면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보지 못한다. 부의 한복판에서도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보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기적적이고 은혜로운 개입이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
"너는 네 부와 성과에 믿음을 두고 있구나. 하지만 그럴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 지금 너는 하나님을 리더로만 여길 뿐 구세주로 삼지는 않고 있구나. 돈 없이 산다고 생각해 봐라. 유산, 통장, 하인, 저택까지 전부 사라지고 오직 나만 남았다고 생각해 봐라. 그래도 행복할 수 있겠느냐?"
예수님의 희생에 진정으로 감사하면 돈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예수님과 돈 가운데 무엇을 더 중시하느냐에 따라 돈을 움켜쥘 수도 있고 후히 나눠 줄 수도 있다. 돈의 부정적인 힘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 전부를 내주신 진정한 부자 청년을 바라보는 것이다.
"내 능력은 권력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나처럼 권력과 돈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사람들에게로 흘러간다. 너는 어떻게 살려느냐?"
사랑할 수 없어도 사랑을 멈추지 말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셔야만 했던게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돌아가셨던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대신 희생해 주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면 아무런 대가가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가난하거나 힘들거나 박해를 받거나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하면 희생이 따른다. 자기희생 없이는 그런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죄는 모른 체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용서할게"라고 말한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거나 회복되지 않는다.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도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기꺼이 죽으심으로 그 빚을 대신 갚아 주셨다.
교만은 진실을 보지 모사도록 눈을 가린다. 교만의 가장 흔한 표현은 걱정이다. "내 삶은 이러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지 않을까?"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할 때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진정한 겸손은 걱정이 아니라 영혼에 안식을 준다.
권력을 통해 영향력을 얻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권력을 통해 얻은 영향력으로는 사회를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주변사람들에게 희생적인 사랑을 퍼부으라. 그러면 곧 그들이 너희 없이 살아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너희가 자신만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도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너희를 신뢰할 것이다. 그들이 알아서 너희를 우러러보면 너희에게 진정한 영향력이 생긴 것이다. 진정한 영향력은 남들에게서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자발적으로 주는 것이다.
복음을 믿지 않고 자기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으면 순수한 사랑으로 남을 도울 수 없다고 말한다. 남을 돕는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통해 우리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나면 선행이 주는 약간의 자존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십자가를 진정으로 아는 순간 우리는 더없이 겸손해진다.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선물을 주신 분을 닮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상대방이 섬겨 줄 만한 사람인지는 전혀 따지지 않는다. 오직 복음만이 이타적인 삶을 위한 순수한 동기를 일으킬 수 있다.
삶을 비출 말씀의 횃불을 들라.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두가지 뿐이다. 받아들이든가 거부하든가. 죽이든가 영광을 돌리든가. 제발 예수님을 삶의 구석에 두지 말라. 그런 곳에 어울리는 분이 아니다. 그분께 전부를 바치라. 그분을 삶의 중심으로 모셔라. 그래야 그분의 인격이 당신 안으로 스며들 것이다.
날마다 예수를 먹고 마시라.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 마땅한 형벌을 받으셨다. 세상의 모든 죄가 그분을 뒤덮었다. 그분은 형벌이 우리를 영원히 넘어가도록 스스로 모든 형벌을 받을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다시 말 하지만 모든 진정한 사랑은 대속과 희생의 사랑이다. 대속의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상한 심령과 죄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나는 사형선고를 받은 노예였소. 하지만 어린 양의 피 아래 숨은 덕분에 종살이에서 탈출할 수 있었지요.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따라 약속의 땅으로 가는 중이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을 믿는가? 그렇다면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만찬에 참여하는 날, 당신의 가장 간절한 소망이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다.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
예수님은 상황을 자신의 뜻대로 바꾸려고 하시지 않았다. 결국 순종하셨다.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내려 놓고 자신의 욕구를 아버지의 뜻 앞에 복종시키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힘겨워하면서도 사랑으로 순종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고난을 피하지도 않으셨다. 사랑이 그분을 고난으로 이끄셨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그분은 순종하셨다. 아버지를 사랑하시기에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방법으로만 세상과 싸우라.
크리스천들은 돈, 권력, 명예, 지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 세상 나라의 꼭대기에 있는 것들은 크리스천을 지배하지 못한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하면 세상 가치의 마수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자신의 성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워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권력과 돈과 지위를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다. 더 이상 그런 것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저 자유로울 뿐이다. 돈이나 권력이 생기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 좋다. 돈이나 권력이 사라져도 하나님이 또 다른 방법으로 역사하실 테니 아무런 걱정이 없다.
날마다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아들이 영원 전부터 사랑을 나누던 아버지께 버림을 받았으니 그 충격은 가히 상상할 수도 없다. 무한히 오래된 사랑, 더없이 완벽한 사랑. 예수님은 그것을 잃으셨다. 영원한 춤에서 배제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을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버림을 받지 않도록 대신 버림을 받으셨다.
다른 것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면 방향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물론이고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다. 돈이나 직업적 성공, 사랑 같은 것이 당장은 좋아 보여도 우리 영혼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대상을 찾고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적인 것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다.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면 항상 두려움이나 분노, 교만, 신세 한탄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사람들에게서 멀어진다.
고난은 '인간'을 완전하 어둠으로 내몰곤 한다. 대개 우리는 자신이 고난 받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예수님의 고난이 제자들에게 무의미해 보였던 것처럼 우리의 고난도 부당하게만 보인다. 하지만 십자가는 고난의 이유가 '아닌' 것을 밝혀 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관해 아무런 계획도 없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은 절대 아니다. 예수님이 버림을 받고 우리의 죗값을 치르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 버리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신다는 증거다. 또한 십자가는 아무런 까닭 없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다.
대역전의 날을 소망하라.
빈 무덤, 무수한 증인의 증언,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 이 세가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일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이 유일한 세상이 아니다. 이 몸이 유일한 몸이 아니다. 이 삶이 끝이 아니다. 언젠가 '완벽한' 삶, 진짜 삶을 얻을 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모든 걱정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부활을 믿는 우리는 모든 고난이 사라질 날을 고대한다. 우리의 고난이 영광스러워지는 날을 고대한다. 상처를 이해하고 나면 그 상처의 기억으로 인해 남은 삶이 영광과 기쁨으로 가득해진다. 제자들은 상처 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며 그분이 해 주신 일을 떠올렸다. 자신들을 망쳤다고 생각했던 상처가 알고 보니 자신들을 구원한 상처였다.
하나님이 세상만사를 바로잡으실 날, 모든 슬픔이 사라질 날, 바로 주의 날 우리의 상처도 영광스러워질 것이다.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고난이 오히려 영원한 기쁨을 더해 줄 것이다. 그날, 모든 것이 역전되고 측량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올 것이다. 영광의 기쁨이 우리가 겪은 상처보다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부활과 회복이라는 빛 속에서 살자. 영광스럽고 영원하고 즐거운 은혜의 춤 속에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