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미국으로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 선교 활동을 하면서 외국인에게 영어를 도와주는 Darwin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 때 성경이 너무 많다고 느껴지더라도 로마서 만큼은 꼭 읽으라고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나에게 성경은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취업 준비로 인해서 심리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그 이후에 5년쯤 지나서 스마트폰을 통해서 새벽예배를 들으면서 '로마서 강해' 설교를 들었다. 처음으로 내가 로마서를 읽은 순간이었다. 그 당시에는 감명깊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잊혀졌다.
그 후 또 3년 정도가 지나서 팀머시 켈러 목사님이 로마서를 쉽게 풀어쓴 책이 있는 것을 보고 구입해서 읽게 되었다. 부모님 댁에서 쉬면서 한 번 읽었고 이번에는 한 구절 한 구절 꼼꼼하게 밑줄도 그어가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아직은 성경을 직접 읽기 보다는 성경을 해설해준 책이 읽기가 편한거 같다.
예수님께서 그럴 자격이 없는 죄로 가득찬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음을 당하셨고 그를 통해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의롭게 되었다. 우리의 노력과 선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인해서 인해서 구원받는 사실을 깨닫고 믿음으로써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변화하게 된다. 존 스토트, 마틴 루터, 장 칼뱅, 어거스틴 모두 로마서를 통해서 인생이 새로워졌다. 나도 내 옛사람을 죽이고 예수님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그들처럼 새로워지고 싶다.
1.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은 선언이자 선포다. 복음은 따라야 할 충고가 아니라, 이루어진 것에 대한 소식, 그것도 좋은 소식이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영구히 보장해 준다. 따라서 세상의 어떤 능력보다 강력하다. 복음은 모두에게 그리고 누구에게나 왔다. 하지만 바울은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으로 한정하고 있기도 하다.
복음이 삶을 새롭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이유는 무엇인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이나 조직에 갚아야 할 빚이나 채무가 없는 것을 말한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서 우리가 그 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진노
복음이 단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면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필요하다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앞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다.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가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한다. 경건하지 않음은 하나님의 권한을 무시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파괴한다. 불의는 사랑, 진리, 정의 등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경시해서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망가뜨린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장 큰 두 가지 계명을 위반한 것이다.
3. 죄의 본질, 동기
에덴동산에서 뱀의 첫 번째 시험이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 3:5). 이것이 첫 번째 죄의 본질이자 우리가 짓는 모든 죄의 본질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세상과 인생을 다스리고 싶어 하는 깊은 욕망이 있다. 우리는 주권을 원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규정한 모든 법은 우리의 절대 주권을 침해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원하는 대로 살면서 최고가 되려는 우리의 욕망을 막는다.
4. 하나님의 형벌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의지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결과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숭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숭배해야만 한다. 우리 존재는 창조주를 경배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분을 거부하면 다른 무엇인가를 숭배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히 좋게" 창조하셨으므로 피조물들 안에는 온갖 좋은 것들이 있다.
불경건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지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가장 큰 문제는 나쁜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들을 과도하게 욕망해서, 창조된 좋은 것들을 숭배와 섬김의 대상, 곧 신으로 삼는다는 데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최악의 형벌은 자신의 우상숭배적인 욕망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상숭배와 악의 파괴적인 힘에 우리를 넘겨주는 것이다.
5. 도덕주의와 행위에 의한 구원
종교적 순종이 경건해보일지라도 그것은 우상숭배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이들은 자신들이 도덕적이라는 데서 자신의 가치를 찾고, 스스로 만든 규율들을 준수함으로써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선함이 자신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숭배하는 것이다.
행위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구원을 위한 근거이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에게 구원받는 믿음이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순종은 믿음의 결과이지 구원을 받기 위한 또 다른 조건이 아니다.
6. 모두가 죄인이다
예수님의 십계명의 내용이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뿐 아니라 내면의 태도와 동기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 주셨다. 열 번째 계명인 "탐내지 말라"는 내적인 태도와 마음의 관심에 관한 것이다. "탐심"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탐심"에는 시기와 자기 연민, 불평, 투덜거림이 포함된다. 탐심이란 단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아름다움과 재산, 지지, 인기를 바라는 우상숭배적인 욕망이다.
소름끼칠 만큼 부도덕하고 방탕한 삶을 사는 사람이나 양심적이고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이나 똑같이 죄 아래 있는 것이다. 똑같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법적 상태가 같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항상 죄에 물든 것은 아니어도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없다.
7. 율법의 목적
율법의 목적은 우리가 죄인이며 구원이 필요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율법이 자신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 죄의 본성과 그 깊이에 대해서도 부인할 것이다. 요컨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필요를 느끼고 그것을 갈망하기 위해서는, 먼저 율법이 우리에게 "유죄를 선고해야" 한다.
우리에게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죄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율법은 우리가 점검해야 할 표가 아니라 우리가 결코 도달하지 못할 기준이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모두가 심판에 직면해 있고 모두가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하나님의 진노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십자가의 영광은 공허할 뿐이다.
8. 하나님의 의와 믿음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고 구원받는 것이다. 의는 우리 자신의 행위나 노력으로 받을 수 없다. 의는 값없이 주어졌다. 믿음은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태도일 뿐이다.
모든 믿는자는 의롭다 함을 받는다. 거기에는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모두가 죄인이라서 의를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없고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해 죽으셨기에 의를 받지 못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우리를 의롭게 하는 어떤 것도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무에 예수님을 받아들이려면 자랑거리들(정체성, 안전감, 자존감, 자긍심의 근거)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구원받는 길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9. 환난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 환난은 참으로 중요한 것에 집중하도록 우리를 돕는다.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 이것은 어떤 경험을 겪은 후 가지게 되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다. 이 모든 것이 '소망'을 자라게 하는데 소망은 자기 안의 평강과 하나님께 나아감, 그리고 장차 있을 영광에 대한 확신을 더 강하게 보증해 준다. 의롭다 함의 유익이 환난에 의해 줄어들기는커녕 더 커진다.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 만든 기준만큼 자신이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도 결코 그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내면 깊은 곳이 늘 불안하다. 그래서 환난이 닥치면 즉시 자신의 죄 때문에 벌을 받는다고 느낀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없다.
하나님은 환난을 이용하셔서 한 사람이 특정한 죄에 대해 '깨어나도록' '개입'하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이 받을 모든 형벌을 이미 그리스도께 전가시키셨다. 그것은 영원히 사라졌다. 하나님은 당신이 받을 진노를 남겨 두지 않으셨다.
환난으로 인한 기쁨이란 당신의 건강과 재산, 그리고 안락함을 잃는 것이 당신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환난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기쁨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
10.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내적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아직 죄인일 때,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당신의 감정이나 삶의 환경에서 드러나는 모습이 비록 의심과 동요를 일으킬지라도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만은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도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었다면, 이제 친구가 되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실패하게 내버려두고 우리를 포기하시겠는가?
11. 은혜로 구원받았다면 계속 죄를 범해도 되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인해서 우리 죄는 씻겨졌다.
우리는 용서를 받았고 또 받을 것이기 때문에 죄를 계속 지어도 괜찮은 것인가?
특정한 죄에 왜 끌리게 되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하기(우리의 정체성, 자존감)를 구하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온전히 사랑받고 의롭게 되었음을 기억하면 죄를 향한 우리의 동기와 욕망이 허물어지고 약화된다.
내가 죄에 빠진다면 그것은 단지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위해 행해진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12. 하나님의 법은 더 이상 짐이 아니다
우리는 도덕법을 하나님의 갈망이 표현된 것으로 여긴다. 그분은 정직과 순전함, 관용, 진실, 고결함, 친절 등을 사랑하신다. 우리는 이제 우리를 구원한 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그것에 매이지도 않았다.
법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을 존귀하게 하는 길이다. 이렇듯 새로운 체계 안에서 순종하고 남편을 사랑하는 새로운 동기가 있기 때문에 법은 더 이상 짐이 아니다.
매일 아침 죄를 짓지 않기로 다짐하지만 같은 죄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짓게 된다.
나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겠다고 다짐하지만 어느 순간 또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힘들어하는 이웃들을 보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나를 발견하고 다시 한 번 가망 없음을 느낀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열심히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 죄의 유혹은 받겠지만 죄의 노예가 되지는 않을 것이고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법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속에는 강력한 죄의 뿌리가 남아 있다. 새로운 정체성과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법을 기뻐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 죄의 유혹을 받고 죄와 싸우는 것, 더욱이 죄에게 패배하는 것조차 성장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우리를 격려한다. 바울은 자신의 노력이 실패할 것을 안다. 그는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데 자기 자신이나 우리의 순종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 우리의 모든 존재와 행위에 합당한 것은 심판 뿐이다. 지속적인 순종과 참된 변화가 있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노력이 아닌 우리 인생과 관계들을 새롭게 하실 성령의 역사에 의존해야 한다.